
대한민국 사람들이 일본 북해도를 여행시 삿포로나 오타루, 하코다테 등의 도시도 자주 방문하지만,
여름의 라벤더 축제를 비롯한 북해도의 자연을 감상하고 싶은 분들이 방문하는 여행지가 후라노, 비에이 입니다.
북해도의 행정구역인 소라치군은 우리나라에서는 인지도가 높은 지역은 아니지만,
후라노와 비에이 사이에 있는 지역이 소라치 군의 영역이라고 하면 대강 어딘지 감이 잡힐 것이라 봅니다.
북해도는 일본에서도 북위 40도 보다 위에 있는 지역이기에 여름에도 선선해서 피서지로도 인기가 높은데,
이런 서늘한 기후는 맥주의 원재료 중 하나인 홉(Hop)을 경작하고 재배하기에 알맞습니다.
유럽에서도 독일, 체코, 영국 남부, 슬로베니아, 폴란드, 미국에서는 오레건이나 워싱턴 지역이 유명한 홉 산지로
북위 40~50도 부근이라 북해도가 여기에 알맞으며, 우리나라도 통일이 되면 북한 지역이 여기에 해당할 겁니다.
아무튼 북해도에서 1876년 시작한 일본을 대표하는 맥주 양조기업인 삿포로(Sapporo)에서는
이미 19세기부터 유럽에서 가져온 홉의 종자들을 북해도에 재배하여 자국 품종의 홉을 꾸준히 개발했습니다.
일본 삿포로 맥주 회사에서 유럽의 홉들을 교배하여 1970년대 후반 개발한 홉으로 Sorachi Ace 가 있습니다.
본래는 필스너 우르켈에 주인공 홉으로 이름이 높은 체코 사츠(Saaz)홉의 쓴 맛 성분(알파산)을 높일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1980년대라면 삿포로 또한 여전히 유럽식 금색 라거에서 유래한 맥주들이 주력일 때이니,
더 효율적인 맥주의 쓴 맛 생성을 위해 Sorachi Ace 를 개발했을 겁니다.
1984년 삿포로에서 정식으로 출시된 Sorachi Ace 는 일본과 중국의 삿포로 홉 농장에서 재배되었으나,
삿포로가 주로 생산하는 맥주들에 어울리는 풍미를 가진 홉이 아니었기에 미운오리새끼 신세가 되고 맙니다.
위에 Sorachi Ace 홉의 풍미를 묘사한 단어들을 보면 알겠지만,
레몬그라스(Lemongrass)
딜(Dill)
박하
민트
히노끼
등등으로 비유되는 풍미를 자아내는 홉이 Sorachi Ace 입니다.
1980년대 일본이라면 그 유명한 '아사히 슈퍼 드라이' 가 1987년 출시되어 큰 인기를 끌었고,
1990년 '기린 이치방 시보리' 라거가 나와서 기린 맥주의 대표 상품이 되던 시기였습니다.
대중적인 라거에 들어가도 호불호 요소 없도록 잔잔하고 은은한 꽃-허브 등이 중심이 되는
유럽 노블 홉의 느낌을 살리려 개발한 것이었는데, 민트-박하-레몬그라스가 터지는 Sorach Ace 였죠.
쉽게 상상해서 삿포로 生 , 아사히 수퍼 드라이와 같은 라거를 마시는데 맛과 향에서
박하,민트,히노끼 느낌이 난다고 생각하면, 대중라거에 적합한 홉이라고 당연히 생각하진 않을 겁니다.
일본에서 소외된 Sorachi Ace 홉은 미국에서 다시 데뷔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1990년대 미국에서 연구용으로 재배가 이뤄진 것으로 시작하여, 2006년에는 상업용 홉으로 재배가 시작됩니다.
당시 미국은 1980년 크래프트 맥주의 문화가 시작된 지 30년 가까이 되던 시기이고,
새로운 맥주 스타일에 대한 갈망과 또 새로운 풍미를 자아내는 홉들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던 때입니다.
예를 들어 현재 미국 크래프트 맥주 IPA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원 탑 홉인
시트라(Citra) 또한 2007년 공식 출시되었습니다. Sorachi Ace 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홉입니다.
맥주 홉(Hop) 시장 또한 아이돌 시장과 비슷해서 연습생 시절을 거쳐 데뷔하는 것도 유사하며,
인기 있는 홉들은 쭉 스타로서 생명력이 유지되지만, 그렇지 못한 홉들은 금방 잊혀지게 됩니다.
미국에서 인기있는 홉들은 그 당시에도 열대과일이나 시트러스와 같은 과일 향이 터지는 홉들이었는데,
사실 Sorachi Ace 는 다른 미국 신생 홉들과 달리 시트러스 느낌만 팡팡 터지는 계열은 아니었습니다.
앞서 풍미의 비유를 봐서 알겠지만, 딜(Dill)과 같은 향신료나 레몬그라스나 민트와 같은 식물느낌
히노끼와 같은 화한(Spicy)느낌도 주는 단순하지 않고 묘한 느낌의 홉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Sorachi Ace 홉은 아이돌로 보면 엄청나게 예쁘거나 잘생긴 비쥬얼 멤버라기보다는,
자기 개성이 뚜렷하여 눈에 띄는 멤버였습니다. 실제로 그래서 Sorachi Ace 의 풍미에 주목한 곳은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Brooklyn) 양조장이었는데, Sorachi Ace 라는 이름의 맥주가 나오게 됩니다.
애당초 홉 품종의 이름 = 맥주의 이름이라는 것은 해당 홉을 완전히 부각시킬 목적이라는 의미도 되는데,
2010년에 첫 출시된 이 맥주는 홉을 강조한 IPA 가 아니라 American Farmhouse Ale 타입이었습니다.
개성이 있는 홉 멤버가 활약할 수 있는 맞춤형 맥주 스타일로 기획한 셈입니다.
벨기에의 농주인 세종(Saison)이라는 스타일을 미국식으로 재해석한 American Farmhouse Ale 이
2000년대 중반부터 미국 크래프트 맥주 시장에서 점차 인기를 얻어가던 시기였는데,
세종(Saison)스타일을 발효하는 효모가 만들어내는 특유의 알싸한 향신료 같은 느낌이
Sorachi Ace 가 생성하는 향신료, 레몬그라스, 민트 등등과 결합해서 더 큰 시너지를 내었기에
'Sorachi Ace Ale' 은 어느덧 브루클린 양조장을 대표하는 맥주들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됩니다.
(참고로 해당 맥주는 국내에도 2010년 중반 ~ 코로나19 이전까지 정식 수입되어 판매되었습니다. 현재는 없습니다.)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상단 사진 오른쪽 이미지처럼 Sorachi Ace Ale 홈브루 키트까지 출시 된 것입니다.
브루클린의 제품 덕분에 크래프트 맥주 시장에서 Sorachi Ace 라는 홉의 존재와 개성을 알고 매료된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후 미국을 비롯한 많은 지역의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에서 Sorachi Ace 홉을 활용한 맥주들을 출시하고 있습니다.
아까 글에서 홉을 아이돌로 비교하긴 했는데, 사실 예쁘고 잘생긴 아이돌 멤버는 많아서 인기는 많지만
나중에 돌이켜 생각하면 개성있었던 멤버가 더 기억에 남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열대과일-시트러스가 팡팡 터지는 풍미의 홉들은 많았지만 사실 그 홉들이 맥주에 들어갔을 때,
여기에는 무슨 홉이 들어갔는지 맞추는건 전문가라도 쉽지는 않습니다. 비슷한 인기 홉들이 섞여 들어갔기 때문이죠.
다만 Sorachi Ace 는 금방 포착이 되어서, "여기에는 Socrachi Ace 가 들어갔구나!" 쉽게 맞출 수가 있습니다.
그만큼 자기 개성이 뚜렷한 독특한 풍미를 가진 홉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러던 가운데 Sorachi Ace 홉의 고향인 일본의 맥주 시장이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EP.002 와 004 의 글에서 설명한 내용으로, 일본 4대 대기업 브랜드들이 2010년대 중반부터
점차 개성이 있는 맥주 스타일의 발굴과 새로운 컨셉의 맥주 시리즈들을 경쟁적으로 출시하게 되는데,
80-90년대부터 유지하던 슈퍼드라이/기린이치방과 같은 라거 맥주들 만으로는 젊은 세대의 입맛을 충족시키기 못하고,
우직하게 기성 맥주만 밀었다간 독특한 시도를 보이는 경쟁사들에게 밀리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삿포로(Sapporo) 양조장은 삿포로 브랜드와 에비수(Yebisu) 브랜드에 새로운 라인업과 제품들을 선보이기 시작했고,
그 결과 2019년 처음으로 공개한 맥주가 Sorachi 1984 라는 Golden Ale 입니다.
앞서 설명 했듯 삿포로 맥주회사가 Sorachi Ace 홉을 처음 출시한 년도가 1984년이었고,
당시에는 대중라거로 승부를 보던 시기라 소외되었지만 2020년대는 상황이 달라졌고,
미국을 비롯한 크래프트 맥주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Sorachi Ace 홉의 위상도 더 이상 미운오리새끼가 아니었죠.
미국에서 성공을 거두고 돌아온 북해도 출신 홉이라는 금의환향 스토리도 충분하고,
특유의 독특한 풍미는 일본의 새로운 소비자 층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요소가 되었다고 판단한 것으로,
2026년 현재에도 일본 현지에서는 Sorachi 1984 를 일본의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습니다.
삿포로 본사에서도 메인 맥주들 중 하나로 삼고 있어서 따로 홈페이지를 구축하여 홍보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일본을 여행하고 온 대한민국 국민들도 현지에서 사 마셔본 경험으로 SNS 등지에
'소라치 맥주 맛있었는데, 국내에서 구할 수가 없어 아쉽다' 는 식의 글들이 은근 보이는데,
사실 오늘의 글을 작성하게 된 경위도 얼마 전 맥주 초보분들을 상대로 진행했던 Beer Tasting Survey 에서
참가자의 맥주 취향을 알아보기 위한 설문지에 가장 좋아하는 맥주를 적는 칸이 있는데,
여기에 어떤 분이 우리나라에 정식 수입도 되지 않는 '소라치' 를 적은 것을 확인해서 였습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수 많은 맥주들 중 그것을 콕 집어서 적었을까?' 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한 것이죠.
글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문득 든 생각은, 2010년대 중후반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맥주 수입맥주 시장에는 Brookyn Sorachi Ace 맥주도 있었고,
국내 홈브루 재료 상점이나 도매수입 홉 판매리스트에 Sorachi Ace 홉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모두 국내에서 구할 수 없게 되었고, 삿포로 맥주의 Sorachi 1984 또한
국내에 정식 수입되진 않기에 일본 현지 여행을 해야만 마실 수 있는 맥주이기도 합니다.
즉, 글을 이렇게 썼지만 정작 읽는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이야기를 쓴 셈인데,
그래도 머지않아 맥주 홉이든 삿포로 1984든 국내에 들어올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합니다.
오늘 글은 일종의 홉(Hop) 열전과 같은 주제의 글이었는데,
추후 다른 품종의 홉들에 관해서도 이와 같은 글을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